쇼펜하우어의 영향
화가 빌헬름 부쉬가 그린 쇼펜하우어와 푸들.
쇼펜하우어는 철학분야 보다도 그 외의 과학분야, 예술분야에 더욱 큰 영향을 끼쳤다. 1852년에 영국의 존 옥센포드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리뷰> 4월호에 쇼펜하우어 사상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존 옥센포드는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등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 쇼펜하우어가 알려졌고,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찰스 다윈같은 영미권 지식인들이 쇼펜하우어를 탐구했다. '아르투르'는 영어로는 '아서'(Arthur)가 되는데 이것은 사업가였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자 영국친화적인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미국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신의 저서에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했고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권위적이고 틀에 박힌 것을 깨부수는 개성, 인격이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에머슨은 우파니샤드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다. [14]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1859년에 나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게 무관심했으므로 바그너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1854년에 친구이자 시인인 게오르그 헤르베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들고 바그너를 찾아갔다. 헤르베크는 바그너에게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해주었다. 바그너는 이것을 한 번 읽었고 감동받았다. 바그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년 동안 4번이나 통독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 니벨룽겐의 반지와 '존경하는 마음과 함께'라는 자필 헌사를 보냈으나 쇼펜하우어는 어떤 답장도 바그너에게 보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의 작품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바그너와 함께 관람한 적도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 대해서 '바그너는 음악이 뭔지 잘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평생 동안 쇼펜하우어를 존경했다.[15]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억압에 대해서 자신보다 먼저 쇼펜하우어가 잘 설명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16]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헤겔의 거만한 문체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탐구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 헤겔은 마치 자신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다."[17]
— 카를 융 자서전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는 문학계일 것이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그리고 독일 작가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영미권 작가인 토마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창작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와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의 소설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는 톨스토이의 친구이자 당시에 러시아어로 쇼펜하우어를 번역한 사람이다. 톨스토이가 친구인 페트 센신에게 보낸 편지는 페트 센신의 저술《추억의 기록》에 들어있는데 이것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쇼펜하우어가 세계의 모든 인간들 중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 생각한다네. 쇼펜하우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세상에 바보들이 많기 때문일 거야'[18]
단편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영국의 윌리엄 서머싯 몸,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등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가들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이후에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조지 버나드 쇼, 루이지 피란델로, 사무엘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는 철학자는 별로 없다. 예술,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칼 마르크스조차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당연히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전반부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했다.[19]
독일 철학자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친구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 전집 출판에 힘을 썼고, 쇼펜하우어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인도철학과 우파니샤드에 대한 연구자로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도이젠은 직접 인도로 여행을 갔고 이에 대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도이젠은 플라톤, 칸트, 인도철학, 쇼펜하우어에 대한 저서를 남겼고 학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했다.[20]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 속하는 19세기 전반에 쇼펜하우어는 무시 당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는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20세기 전반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난해하다고 무시되기도 했고, 일부 철학 교사들조차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쇼펜하우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20세기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에게 명백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21][22]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 쇼펜하우어와 찰스 다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다.[23] 칼 포퍼는 에르빈 슈뢰딩거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책 이름을 짓는 일에 쇼펜하우어가 지은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는 웬만한 철학서적은 대부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 책을 읽다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만났는데 칸트의 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쇼펜하우어의 여러 저서들을 읽었고 그 덕분에 칸트의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은 자신이 태어나서 최초로 진지하게 읽고 공부한 두꺼운 철학서적이라고 말했다.[24]
에피소드
쇼펜하우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로베르트 호른슈타인이라는 음악가가 1855년에 쇼펜하우어 자택을 방문했다. 이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인 젊은 작곡가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회상》이라는 책을 남겼다. 호른슈타인은 이 책에서 스승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렸다. 호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다른 예술가나 예술분야의 권위자들을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 때였다. 여류 소설가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동네 주민들에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청년시절부터 입어 온 유행이 지난 외투를 입고 다녔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모습과 쇼펜하우어의 애완견인 푸들 '아트만'은 프랑크푸르트의 명물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항상 이런 식의 차림으로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며 산책을 했다. 칸트의 성실한 산책 이야기가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듯이 애완견과 같이 산책하는 쇼펜하우어의 모습이 마치 인격이 좋은 주인과 충직한 애완견처럼 보여서 유명해졌다.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왠만하면 평안한 기분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산책을 꼬박꼬박 했다. 쇼펜하우어는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걸어다닐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걷던 동네 주민들은 가끔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매일 점심밥을 먹고 나서 플루트를 불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피안》에서 쇼펜하우어와 플루트에 대해서 언급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 사실은 쇼펜하우어가 청년 시절부터 악보를 술술 읽고 모차르트 음악 연구에 몰두한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음악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음악철학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바그너는 베토벤 기념 논문인 '베토벤'에서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문학이나 조형예술 등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명쾌하게 음악이 다른 예술분야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이렇게 썼다'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진 쇼펜하우어 흉상.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이라는 말과 쇼펜하우어의 '고뇌'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년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많은 일기 속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감격적인 글들이 남아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순간》이라는 책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헤겔에 대한 비판 맹목적인 낙천주의 근대과학의 오만함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키에르케고르와 쇼펜하우어의 공통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기 2년 전에 그러니까 1853년 정도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50년대 중반의 일이다. 독일 브레슬라우대학교의 켈바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자연과학의 관계'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쇼펜하우어에 대한 비평과 책들이 출판되었다. 영국에서는 쇼펜하우어 책의 일부가 편역되어 떠돌았고 프랑스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특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서적 보다는 통속적이고 명쾌한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는 '여록과 보유'라는 책이 더 인기를 끌었다. 쇼펜하우어의 자택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도 이 시기에 쇼펜하우어를 방문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존경과 칭찬의 편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사람도 꽤 있었다. 1858년에는 쇼펜하우어의 70살 생일 잔치가 열렸고 이 때에 쇼펜하우어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독일 작가 테오도어 폰타네의 절친 빈케라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은으로 만든 잔을 생일 선물로 주었다. 괴테의 며느리였던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책 출판에 대한 축하 편지를 썼다.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여동생과도 친했고 쇼펜하우어가 젊었을 때부터 괴테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를 응원해준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 편지를 받고 오틸리에 괴테에게 감격에 찬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마그데부르크의 법률고문관으로 재직한 프리드리히 드루그트는 쇼펜하우어의 논문과 저서들에 감격하여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수제자가 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는 쇼펜하우어 사후에 유고를 정리하여 《토론의 법칙》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쇼펜하우어 전집을 출판했다. 사법관이었던 아담 도스라는 사람은 어린 나이인데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에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쇼펜하우어 화강암 무덤
쇼펜하우어와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변호사 빌헬름 그비너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격하여 먼저 찾아와 진지한 이야기를 해서 쇼펜하우어와 친해진 사람이었다.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의 유언을 집행했고 쇼펜하우어 집안의 유산을 유언에 따라 잘 처리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평평한 화강암을 이용해 묘비를 만들어 줄 것을 생전에 희망했고 묘비에다가 자신의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적지마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 여류 조각가 엘리자베스 네이가 찾아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대리석으로 만들 흉상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이 흉상을 보고 쇼펜하우어는 만족스러워 했다. 이 흉상의 진품은 현재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시의 네이미술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