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레냐노에서 태어났다. 오페라 팬들에게는 베르디 오페라 [레냐노의 전투]로 기억되는 곳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살리에리는 열네 살 때 고아가 된 뒤 그를 눈여겨 본 작곡가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Leopold Gassmann)의 주선으로 오스트리아에 진출했다. 24세 때 오스트리아 궁정의 인정을 받아 궁정 오페라 감독으로 임명됐으며 38세 때는 황실의 예배와 음악교육을 책임지는 ‘카펠마이스터'가 됐다. 음악가로서는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의 직위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은 교육자로서의 역할이다. 베토벤은 1792년 본에서 빈으로 이주한 뒤 당대의 유명 음악교사들을 찾아다녔다. 바쁜 모차르트는 4개월간의 가르침만을 주었고 하이든도 런던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바람에 레슨은 2년으로 끝났다. 이후 서른 살이 된 ‘성숙한’ 베토벤에게 살리에리는 1800년부터 오페라를 비롯한 성악 작법과 하이든이 모두 알려주지 못한 대위법을 가르쳤다. 베토벤은 여러 편지와 방대한 분량의 대화록에서 ‘살리에리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자주 드러냈다.
슈베르트에게는 살리에리의 역할이 훨씬 컸다. 1804년, 당시 일곱 살에 불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가 노래를 잘 할뿐더러 뛰어난 음악성을 갖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4년 뒤 빈의 음악원(콘빅트)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준 주인공이 살리에리였기 때문이다. 1814년 슈베르트가 콘빅트를 졸업한 뒤에도 3년 동안이나 살리에리는 슈베르트가 보낸 작품을 살펴보며 섬세한 코치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피터 셰퍼(Peter Shaffer)의 희곡 『아마데우스』가 나오기 전까지 세계 청소년들에게 살리에리의 이름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슈베르트 전기 속의 ‘감사한 살리에리 선생님’으로 남아있었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슈베르트가 “독일 시에 곡을 붙이는 것은 보람 없는 일이니 시도할 것이 못 된다”라는 살리에리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수많은 보석 같은 독일 가곡을 탄생시켰던 점이다.
이밖에 살리에리는 피아노의 귀재였던 프란츠 리스트를 가르쳤고 그를 오스트리아 궁정 사회에 널리 소개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Carl Czerny)도 지도했으며, 짧은 시간 가르쳤던 오페라 작곡가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에게 ‘이탈리아에 가서 견문을 쌓아보라’는 조언을 주어 음악사의 한 장을 바꾸기도 했다.
오늘날 살리에리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주로 ‘모차르트를 해친 재능 없는 음악가’라는 데 그친다. 그는 알려진 대로 세련된 기법이나 취향이 없는, 무능한 작곡가였을까? 그는 가스만의 천거로 황제 요제프 2세의 만찬에서 연주하면서 황실이 총애하는 음악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 시기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인물이 오페라 개혁가로 전 유럽 음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음악적 취향도, 감식안도 갖추지 못했던 요제프 2세의 영향력 덕분에 살리에리가 특징 없는 작품만 쓰면서 오스트리아 제국 음악의 고위직을 독차지했던 것으로 여기지만, 그가 34년 동안 35편의 오페라를 쓰면서 그 대부분을 흥행에 성공했던 점을 고려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베토벤이 성악 작곡의 교사로 살리에리를 선택한 점을 보아도 그가 당대 성악 예술 기법의 최고봉에 선 것으로 인식됐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살리에리의 인기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시들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거의 신작을 내놓지 않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대중의 달라진 취향’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바로크 시대 대가들의 보수적 스타일을 이어받은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의고적 (擬古的)인 것, 한물 간 것으로 여겨졌다. 기악에서는 사정이 더 나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완벽한 고전주의적 형식원리를 응용한 소나타와 협주곡, 교향곡을 쏟아낸 반면, 살리에리의 기악 작품들은 긴 구조를 효율적으로 쌓아올릴 수 없는 지난 시대의 ‘갤런트 스타일(gallant style)’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황제의 음악가’였던 살리에리의 이름은 그가 사망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못 말리는 보수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살리에리의 전기를 쓴 모젤에 따르면 살리에리 자신이 만년에 베토벤의 작품들을 언급하면서 “세기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바뀔 즈음엔 사람들의 음악 취향이 나의 시대로부터 바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 얻은 단순함보다는 유별난 것, 장르 간의 벽 깨기가 우선시 됐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그에게 ‘살인범’의 누명을 뒤집어 씌운 피터 셰퍼의 희곡과 동명 영화 [아마데우스] 덕분이었다. 그를 무능한 작곡가로 각인시킨 영화가 흥행하면서 오히려 음악학자들과 연주가들도 그의 악보를 다시 들춰보기 시작했다. 2003년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Cecilia Bartoli)가 내놓은 [살리에리 앨범]은 그의 오페라에서 13곡의 대표 아리아를 뽑아 실은 음반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이어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도 살리에리 아리아집을 내놓았다. 2004년에는 담라우가 출연한 살리에리 오페라 [인정받은 유럽]이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돼 음악팬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이는 TV로 중계됐다. 이어 세계의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에서 한층 많은 살리에리의 작품들이 공연되기 시작했다. 음악계와 애호가들이 ‘수법은 낡았지만 그 틀 안에서 최선을 다한’ 살리에리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참조 : 네이버캐스트, 안토니오 살리에리